1-2
* 기린닭 논CP
* 동양풍 AU, 고증 X
만월
그날 밤의 달은 평소 같은 금빛이 아닌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은빛의 보름달이 내리쬐는 옥좌에 회백색의 머릿결이 사락 흘러내리며 아홉 개의 꼬리를 피워 냈다.
“아아~ 지겹네~…”
소름 끼치게 아름다운 음성이 장난스럽게 입에서 빠져나와 피를 흘리며 쓰러진 이들의 육체 위에 나앉았다. 얼핏 흥겨운 듯한 콧노래를 흘린 이는 온몸에 다른 이의 혈흔이 묻어 있어도 개의치 않는 듯이 보였다. 그의 목에 걸린 녹빛 보석만이 쨍한 소리를 내며 스산한 숲을 메꾸고 있었다.
***
바람에 흩날리는 옅은 담청의 옷자락이 소리도 없이 춤을 췄다. 그 주인의 손짓을 따라 유려한 곡선을 그려내며 주위의 시선을 끌었다. 악한 것은 물러가며 좋은 것만 들어오라는 늘 하는 당연한 소리를 입 밖으로 꺼내며 샛노란 눈이 번뜩였다. 화려하지 않은 복장과 의식에도 그를 보러 오는 구경꾼들이 꽤 있었다.
“이보게-! 무당 양반!”
“…?”
갈 채비를 끝내고 발길을 옮기는 지우스를 다급히 붙잡은 이는 방금 굿판을 끝낸 양반집의 종놈 중 하나였다.
“무슨 일입니까?”
“혹시 많이 바쁜가?”
“그리 급한 일은 없소만.”
“이거 잘 됐네! 그러면~”
종놈은 척-, 하고 마을의 뒤편에 자리한 산 하나를 가리켰다.
“저곳에 가는 이들마다 목숨을 잃는 자가 한둘이 아녀. 자네가 가서 좀 알아봐 주겠나?”
지우스는 대놓고 한숨을 쉬며 종놈에게 면박을 줄 뻔했으나 헛기침을 두어 번 하며 그에게서 몸을 반쯤 돌렸다.
“이만 가보겠소.”
“아니 아니! 값은 후히 쳐주겠다고 주인님께서 그러셨네!”
“…잡것들의 소행이라 보십니까?”
“산에 올라가기만 하면 죽어버리는데 어찌 가보겠나! 자네는 자네가 모시는 분도 계시니 쉽게 죽진 않을 거잖나!”
남의 목숨이라고 망발을 내뱉는 게 이 종놈의 본래 성정인지, 아님 생각 없이 자기 주인의 의견을 전하는 것인지 고민하다가 지우스는 손에 든 종을 두어 번 흔들어 딸랑 소리를 내고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값부터 받겠습니다. 저곳에 갔다가 언제 개죽음 당할지 모르니까.”
“아아? 그려, 그려! 내 당장 주인님께 다녀옴세!”
대궐의 문으로 부리나케 들어가는 종놈의 꽁지를 노려보다가 스산한 기운을 풍기는 산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곳에서 잡것들의 낌새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잡신들은 없는 모양인데. 자신은 신내림을 받은 무당도 아니어서 영력이 다른 무당들처럼 뛰어나지도 않았고 간단한 굿이나 가까운 미래 정도를 점지해 주는 게 자신이 가진 능력의 전부였다. 신을 모시고 있다기보단 그 신수가 자신을 선택한 형태나 마찬가지였고. 그렇기에 저 산에 자신이 예상치 못한 거대한 무언가가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였다.
산이 뚫어질 정도로 노려보던 지우스에게 아까의 종놈이 부리나케 달려와 섭섭지 않을 정도로 값을 치러주고는 길을 떠나는 그를 배웅해 주었다.
“…만월인가.”
어느새 자태를 드러낸 둥그런 달을 보며 지우스는 바삐 걸음을 재촉했다. 어차피 마주해야 한다면 일찍 보는 게 나을 터. 잡것의 기운이 아닌 다른 것의 낌새가 느껴지곤 했으니 과연 무슨 연유로 인간 대학살을 벌이는지 호기심이 일기도 하였다. 딸랑, 그의 손에 들린 방울이 주인의 발걸음에 맞춰 움직였다.
***
“후, 허억…”
산은 보기보다 험하였다. 사람이 다닐 만한 적당한 길은 산어귀에서 이미 끝나 있었고 후로는 흙과 돌이 뒤섞인 울퉁불퉁한 지대였다. 가끔 지면 위로 튀어나온 불친절한 나무뿌리 등에 걸려 발을 헛디딘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후……”
산 중턱쯤 다다랐을까. 지우스는 자신의 체력이 약한 게 아님에도 산에서부터 뿜어 나오는 새까만 기백에 눌려 더 이상 전진하는 게 버거웠다. 결국 잠시 쉬기로 하며 근처 적당한 그루터기에 엉덩이를 붙였다.
고요한 바람이 지우스의 목덜미를 스치며 그의 열기를 식혀주었다. 휘영청 뜬 은빛의 보름달 덕에 바닥이 어둡지 않아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진작 이곳에서 꽁무니를 뺐을 것이다. 문득 그의 코끝으로 희미한 탄내가 흘러 들어왔다.
이 밤에 산불인가.
산이 작지도 않은 편이니 불이 난다면 큰 재앙을 불러올 게 분명했다. 올라오는 동안 살아있는 짐승은 단 한 마리도 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이 산에 사는 어떤 생명들을 위해서라도 지우스는 산불인지 확인하기 위해 방금 앉았던 곳과 빠르게 이별했다.
그리고 마주한 것은 눈살이 찌푸려지는 상황이었다.
“…뉘시오?”
“……”
시체를 태우는 건가. 지우스의 음성을 듣고도 불 앞의 이는 돌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온통 새까만 철릭을 입고 검은 갓에 얼굴은 짙은 너울을 늘어뜨려 있어 제대로 된 얼굴 식별도 어려워서 마치 저승사자 같은 모습이었다. 그의 앞엔 서넛쯤 돼 보이는 시체가 한 데 쌓여 불에 태워지고 있었고 그 불에서 열 보쯤 떨어진 곳에 봉긋이 세워진 깔끔한 묘가 하나 있었다.
사람이 아니군.
산 전체에 퍼져 있는 새까만 기운은 저 자가 풍겨 대는 것임을 안 지우스는 방울을 쥐고 몸의 기를 끌어모았다. 청명한 방울이 한 번 울림과 동시에 지우스는 제 눈 앞까지 순식간에 훅 다가오는 새까만 안개를 무력하게 바라만 봐야 했다.
“컥…!”
“인간들은 겁도 없이 계~속 여기 기어들어오는구나.”
등골이 오싹할 정도의 서리 낀 음성이었다. 손에 들린 방울은 어느새 저 멀리까지 던져져 있었다. 지우스는 한 손으로 제 목을 붙잡고 들어 올린 녀석의 얼굴을 보려 애를 썼다. 그러나 상대는 고개를 뒤로 약간 젖혔음에도 검은 너울 때문에 면상이 제대로 보이지가 않았다. 속으로 혀를 찬 지우스는 제 목을 붙잡고 있는 녀석의 손을 떼어내려고 발버둥 치다가 결국 두 손바닥을 마주 보고 단 한 번, 박수를 치고 몸의 기운을 해방시켰다.
“--…!”
“허억, 쿨럭!”
푸른빛이 지우스의 샛노란 눈에 깃들며 대번에 주위의 흐름을 변화시켰다. 상대는 갑작스레 밀려오는 예상치 못한 새파란 기운에 잡고 있던 그의 목을 놓쳤다. 지우스는 목을 가다듬으며 자세를 바로 했다. 상대는 지우스의 그 기세에 놀란 것도 잠시,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고서 웃음기 섞인 음성을 냈다.
“뭐냐, 그 힘?”
“너야말로 누구냐.”
“나?”
한적한 구름 하나가 온몸으로 가리고 있던 달에게서 비켜났다. 그로 인해 은빛의 만월이 자신의 색과 유사한 아홉 개의 꼬리가 화려하게 피어나는 것을 비춰주었다.
“…!”
“대답이 됐나?”
무당의 목울대가 심히 울렁거렸다.
천호. 꼬리가 아홉 개 달려 사람을 홀리거나 잡아먹는 매구와는 다르게 꼬리털이 아홉 갈래로 갈려졌을 뿐, 살과 뼈가 들어있는 진짜 꼬리는 하나뿐인 신성스러운 영물.
지우스는 그의 등 뒤로 펼쳐진 꼬리를 보고서 단박에 그가 천호임을 알아챘다. 새까만 기운에 잠식되어 있어도 본래 자연을 이롭게 하고 인간들과 어울려 지내는 그들의 본성까지 쉬이 가려지지 않았기에. 그러나 눈앞의 이 천호는 그 본성을 지독할 정도로 내리누르고 있었다. 코앞에 싱싱한 살코기를 들이대는데도 끝까지 고개를 돌리는 육식의 짐승처럼. 그의 목에 걸린 녹색의 돌이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반짝였다.
“왜, 쓸데없는 짓을 벌이십니까?”
“아하. 쓸데없다?”
지우스의 말을 장난스럽게 되뇐 그는 여유롭게 뒷짐을 지며 이젠 다 타버려 잔불만 남은 시체 더미에 고개를 돌렸다.
“자, 이 내가 질문 하나 하지.”
시체 감상이 끝났는지 그는 두 팔을 양쪽으로 느긋하게 벌리며 마치 극을 하는 듯한 동작을 이어갔다.
“그대가 가져야 할 ‘당연한 것’은 누가 앗아갔나?”
“…무슨 뜻입니까.”
“그 말 뜻 그대로일세.”
그는 아까처럼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지우스의 숨통을 조이려 했으나, 아직 개방된 기운이 남아있던 지우스는 그의 손길을 가벼이 피해 몸을 공중에 띄웠다. 그를 노려 지우스의 한쪽 발목을 붙잡았으나 지우스는 그의 어깨를 발판 삼아 그를 밀쳐내고 한 바퀴 공중제비를 재바르게 돌고서 바닥에 착지했다. 찢겨 나간 바지 아랫단에서 붉은 피가 묻어났다.
“제법인데?”
그의 발에 턱을 맞았는지 너울 속에 손을 넣고 턱이 있을 만한 부위를 쓱 쓸더니 하다 만 말을 이어갔다.
“인내는 미련, 배려는 사치, 신뢰는 허황. 충성은 배신. 세상 꼴이 이러하니 그대가 원하는 것을 가장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은가. 이미 그럴 수 있는 힘도 가지고 있고.”
“……”
“근데 왜 가만 당하고 있는 것이지?”
“…그게 제 질문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많지, 아~~주 많지.”
다시 달려들 생각은 없는지 그는 주변의 잡풀조차 없는 묘에게 다가가 그것에 기대어 앉았다. 지우스는 해방된 기운이 몸에서 모조리 빠져나감을 느끼고 덩달아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의 눈에 깃들었던 푸른빛이 빠져나가자 천호는 입맛을 다셨다.
“그 힘, 꽤 탐나는군.”
“…필요하십니까?”
“오호, 필요하다면 내게 줄 텐가?”
아주 짧은 찰나의 시간 동안 지우스의 머리가 빛보다 빠르게 굴러갔다. 그리고 이내 자신이 계산해낼 수 있는 모든 예상 가능한 결과들이 스쳐 지나갔다.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지우스는 힘이 빠져나갔던 다리에 억지로 정신력을 불어넣어 몸을 지탱하고 일어설 수 있도록 만들었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떼 내어 불타버린 시체들을 지나 앉아있는 그에게 꽤 가까이 다가갔다.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이 힘을 써드리겠습니다.”
“…조건이 있겠군.”
고개를 살짝 끄덕인 지우스는 약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저를 지켜주십시오.”
“하. 너를 지켜라?”
“이 힘은 아주 제한적입니다. 당신이 원할 때 쓰시려면 평소엔 지금보다 더 약한 상태로 돌아다녀야 하는데, 제가 잡것들에게 육을 잡아먹혀도 상관없으십니까?”
“허허~…”
팔짱을 끼며 한 손으론 목에 걸린 돌은 만지작거리며 달을 향해 시선을 올리던 그는 한참을 움직이지도 않고 같은 자세로 상념에 잠겨 있었다. 지우스는 혹여 그가 거절을 할까 제시할 만한 다른 대안이 있는지 다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 기다렸다간 숨이 넘어갈지도 모르겠다고 예상한 그때,
“그래, 그러지.”
“…약속입니다.”
“난 그런 거 잘 지켜~”
지우스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천호는 단호하게 말했다. 얼핏 달이 비친 그의 너울의 너머로 희끄무레한 미소를 본 것 같기도 하다.
인간은 아둔하기 짝이 없는 짐승이니 적당히 그에게 맞춰주고 힘을 취하면 될 것이라 여긴 천호였다. 그의 목적은 힘을 갈취하는 것이 아니니까.
하지만 그것은 오랜 세월을 살아 현실성이 없어진 천호의 태평한 착각임을 깨달은 것은 그다지 멀지 않은 앞날이었다.
[글쓴이] 알파카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