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 논CP
나견 나진 위주 + 지우스, 와론 조금
사르다
꿈자리가 유독 뒤숭숭한 날이었다.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다 몸을 일으키자 아직 사위가 어두웠다. 검푸른 새벽빛이 커튼을 투과해 집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모습이 가슴을 술렁이게 만든다. 아직 한참 이른 아침이라 적어도 한두 시간은 더 잘 수 있겠지만 잠이 오지 않는… 몇 번이고 몸을 뒤채던 그는 결국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서 몸을 굴려 내려온 뒤, 바지와 봄 재킷을 챙겨 입고 현관문을 열었다. 차갑고 무거운 공기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우르르 쏟아졌다. 하늘은 맑지만 새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아침이다. 긴 복도식 아파트는 오가는 사람 하나 없이 정적만이 가득하다. 한참을 서 있던 그는 집 밖으로 나와 문을 닫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대신 그는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을 밟았다. 인적 드문 건물 특유의 먼지와 콘크리트 냄새가 새벽 공기에 뒤섞여 기묘한 향을 만들었다. 그는 3층에 산다. 건물 아래로 내려가는 대신 6층이나 더 올라가기로 결심한 것은 일종의 충동이었다. 해가 뜰 때까지 하늘이나 보다가 돌아가겠다고 마음먹는 것은 절대로 그답지 않은 행동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나쁜 꿈을 꾼 날에 그는 늘 스스로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전혀 다른 배경을 가지고 그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살던 완벽한 타인이 그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그의 행세를 하는 것만 같다. 계단을 한 칸씩 밟아 오를 때마다 발자국에 위화감이 묻어난다. 마침내 회색 철문이 눈앞에 들어왔을 때, 그는 어쩐지 그 문이 잠겨 있기를 바랐던 것도 같았다.
동그란 은색 문고리는 차가웠고, 별 저항 없이 돌아갔다. 한 단 정도 높은 바닥을 올라가자 비로소 시야가 탁 트였다. 아직 햇빛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푸르스름한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었지만 고요하고 어둡다. 바다가 하늘의 위치에 있다면 아마도 저런 느낌일 것이다. 옥상 난간으로 천천히 걸어가던 그의 시선을 작은 등대가 잡아끈다. 등대가 아니라 불꽃이었다. 찰칵, 금속성 마찰음과과 함께 켜졌을 조그마한 불빛. 잠 못 드는 어느 흡연자의 라이터일 수도 있었으나, 난간에 기대어 서서 무언가를 태우고 있던 남자는 적어도 흡연자는 아니었다.
그는 홀린 듯 그쪽을 향해 걸어갔다. 주황색과 붉은색과 황금색으로 넘실대며 곱게 접힌 종이를 살라 먹는 불길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꿈 속에서나 존재하던 빛깔이다.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것 같았으나 두렵지 않았다. 종이는 꽤 오랫동안 불탔다. 불꽃이 모서리까지 침범하고 나서야 남자는 손을 놓았다. 큰 덩어리 없이 깔끔하게 타오른 종이는 가볍게 부스러졌다. 그제야 남자는 그의 존재를 인지한 듯 눈을 들었다. 그새 조금 밝아져 청년이 가진 색이 눈에 들어왔다. 새붉음과 노랑. 조금 전까지 타오르던 불의 색을 둘로 갈라 사람에게 칠한다면 이런 느낌일 것이다. 둘은 눈높이가 비슷해 시선을 맞추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뭘 하고 있던 건가요?”
그가 물었다. 남자는 깜빡임 없는 눈으로 그를 보았다. 호리호리한 청년의 외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상하리만치 성숙해 보이는 사람이다. 표정을 읽기 어렵다. 청년은 처음 보았는데도 이상할 정도로 친근하고, 이상할 정도로 낯설었다. 마치 아주 오래전에 알고 있던 사람을 만난 것 같았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시간이 흐르고, 아마 당황한 것처럼 보이던 청년의 표정이 느슨하게 풀어졌다.
“조금 할 일이 있어서… 이상한 일을 하려던 건 아니에요.”
멋쩍게 눈매를 휜 남자는 주머니에 라이터를 집어넣고, 티슈를 꺼내 바닥에 조금 남은 재를 쓸어 모았다. 그는 조금 급해 보였다. 민폐를 끼치려던 것은 아닌데 죄송하다고, 온몸으로 외치는 듯한 몸짓. 그는 뭐라도 말해야 할 것 같아서 머뭇댄다. 이럴 필요 없어. 괜찮아. 몇 가지 문장이 스쳐 지나간 후에야 그는 할 말을 골랐다.
“괜찮습니다. 여기가 저만의 공간인 것도 아니고. 페인트칠 때문에 불도 잘 안 날 걸요?”
동그랗게 뜬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남자는 갑작스레 키득대기 시작했다. 그닥 우스운 말이 아니었는데도 그랬다. 처음에는 작은 키득거림이었던 웃음은 점점 커져, 나중에는 어린아이처럼 깔깔 웃었다. 남자는 그제서야 제 나이를 찾은 것만 같았다. 어째선지, 그도 남자를 따라 웃고 있었다.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
꿈자리는 늘 뒤숭숭했다. 그는 그리 깊게 잠드는 편이 아니었다. 깨어나면 희미한 형체나 심상 정도로만 기억되던 꿈은 가끔씩 그가 세부 사항을 기억해 내는 데 거의 성공할 정도로 선명해졌다. 아마 불꽃이 타올랐던 것 같다. 그전에는 몇 사람이 그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다시 얼마 전에는, 누군가를 만난 것도 같았다. 분명 얼굴을 아는 사람인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가 아는 모든 사람들을 끄집어내 기억을 되살리려 애쓰다 보면 가슴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답답했다. 잠들 수 없는 새벽마다 그는 옥상으로 갔다. 꿈이 짙어지는 주기는 불규칙했다. 해가 조금씩 길어지고는 있지만 여전히 이른 시간인데도 그 남자는 그가 갈 때마다 늘 옥상에 있었다. 곱게 접은 하얀 종이를 들고, 라이터를 켜고, 태운다. 희한한 버릇 내지 의식처럼 보이는 행위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흔들리던 붉고 검은 그림자가 사라지고 평온이 찾아왔다. 가끔 주고받는 몇 마디를 제외하면 두 사람은 길게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알게 된 사실은, 남자는 몇 달 전 이 아파트에 이사를 왔다는 점(그는 이삿짐 차량을 기억했다), 낮에는 매우 바쁘다는 것, 그리고 동생이 하나 있다는 정도. 세상에 하나뿐인 가족이었다고 남자는 말한다. 맑은 웃음 속에서 위화감을 느낀 것도 같았지만 의문은 빠르게 지워졌다.
그리고 어느 날, 그가 눈을 떴을 때, 그는 자신이 어떤 꿈도 꾸지 않고 깨어났음을 알았다. 잔재하는 심상도 그가 기억해 낼 수 없는 사람들의 얼굴도 불꽃도 없었다. 커튼 너머로 많이 옅어진 푸른빛이 잔잔히 흘러들고 있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는 얇은 후드 가디건을 걸치고 옥상에 올랐다. 금빛이 연하게 섞인 하늘색이 맑았다. 오늘은 꿈을 꾸지 않았지만, 남자는 오늘도 거기 있으리라는 이상한 확신이 들어 계단을 달려 올라가 옥상 문을 열었다.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아직 종이를 태우지 않은 남자가 저편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다가가자 남자는, 어느 날부터인가 짓기 시작한 부드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여명 덕분에 그는 남자가 들고 있는 종이가 완벽한 흰색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곱게 접힌 종이는 얇았다. 그 밑으로 희미하게 검은 붓글씨 같은 것이 비쳐 보인다.
“그게 뭐죠?”
그는 종이를 가리켰다. 살짝 웃어 보인 청년은 라이터를 들었다.
“하하, 조금 뒤에 말해 드릴게요. 꼭 지금 해야 하는 일이라서요.”
찰칵 소리와 함께 조그만 불꽃이 피어난다. 어린 새처럼 파닥이는 불은 종이를 향해 몸을 뻗고, 종이는 늘 그렇듯 천천히 타오르기 시작했다. 평온했지만, 그는 어쩐지 불안하다. 불꽃을 끄고 이 일을 멈추게 해야 할 것만 같다. 남자가 원하는 일을 하게 두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가 이상한 양가감정 속에서 굳어 있는 동안 종이는 잿가루조차 남기지 않고 전부 타들어갔다. 동시에, 그를 사로잡았던 충동이 전부 사그라들고 그는 새벽 공기의 상쾌함을 느낄 수 있다.
“뭐냐고 여쭤보셨죠? 기원이에요.”
청년은 웃지만, 청년의 얼굴에서 그가 지금껏 느꼈던 기묘한 친근함을 볼 수는 없었다.
“그게 기원이었나요?”
“맞아요. 간절히 바라는 게 있어서요. 소지를 올린다고 하죠? 저는 무당도 도사도 아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요.”
청년은 머쓱하게 웃는다. 눈꼬리를 접는 청년의 모습은 후련한 동시에 어쩐지 쓸쓸하다. 더 이상 가까운 사람처럼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그는 천천히 입을 뗀다.
“뭘 바라고 있었든, 이뤄지길 바랄게요.”
“감사합니다.”
그는 짧게 목례한 뒤 미련 없이 돌아섰다. 돌아서기 직전 본 청년의 얼굴에 무언가 스쳐 지나갔지만, 너무 찰나의 순간 지나가서 그는 자신이 본 감정을 착각이라고 여겼다.
옥상에서 내려오는 동안 계단에 난 창문으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한동안 새 소리를 들은 기억이 없었는데, 날씨가 따뜻해지긴 한 모양이다. 계단을 내려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지나치려는데, 그 앞에 서 있던 사람이 그를 막아섰다. 키가 별로 크지 않은데도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였다. 신종 포교 수법이라도 되는 건가. 그는 즉시 멈추어 서서 사내를 경계했다. 예상과는 다르게, 사내는 알 수 없는 말을 툭 던졌다.
“결국 끝났군.”
베이지색 비니를 푹 눌러쓴 사람은 탐색하듯 그를 바라본다. 검게 그늘진 얼굴 한가운데에 박힌 금색 눈동자가 그를 꿰뚫듯 응시했다. 불쾌할 정도로 강렬한 시선이다. 그는 눈을 피하지 않으며, 도전적으로 사내를 노려본다.
“뭐, 그것도 녀석의 선택이지. 그런 기억 같은 건 넘겨주지 않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니까.”
“무슨 헛소리야?”
“만났던 게 그 녀석이 아니라 너였어도 제법 볼만했겠군. 그 녀석이 네 싸가지까지 완벽하게 구사한 줄은 몰랐다만.”
사내는 그를 향해 다가왔지만, 위해를 가하거나 무언가 다른 일을 저지르는 대신 스쳐 지나갔다. 차분한 목소리가 울렸다.
“잘 살라는 뜻이다. 나쁜 꿈에 시달리지도 말고.”
주머니에 손을 꽂은 사내는 나진을 내버려 두고 계단을 내려갔다. 자박자박 울리던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나진은 그 뒷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어쩐지 옥상으로 올라가 보아야만 할 것 같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청년이 아직 난간 앞에 서서 아침을 기다리고 있을 텐데. 한참을 서 있던 나진은 휴대폰 알림음이 들리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몸을 씻고 아침을 먹은 뒤, 하루 일과를 완벽히 소화했다. 밤이 찾아오고, 잠들기 직전에야 그는 사내가 위로하듯 남겨두고 간 말에서 이상한 점을 찾아낼 수 있었다.
내가 꿈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나?
***
“하여간~ 가족과 새 인연이 무작위로 정해진다는 건 참 어려워. 그치?”
난간 너머로 바람이 불어 나간다. 나견은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부옇게 변하려는 시야를 몇 번의 깜박임으로 흘려보낸 나견은 점점 밝아지는 동쪽 하늘을 본다. 불은 탄생과 시작인 동시에 소멸과 죽음이다. 종이를 태우고 기원함으로써 나견은 그의 하나뿐인 가족에게 남아 있던 유일한 흔적을 죽였다. 의식 밖으로 떠오르는 순간, ‘나진’의 기억은 지금의 나진을 지금의 삶에서 벗어나게 만들 것이다. 평범한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고 할 일이 있으며 위험에 처하지 않는 인생을.
옥상 문이 열렸다. 일말의 기대감으로 나견은 고개를 돌린다. 다신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견은, 딱 한 번만이라도 더 동생이 보고 싶었다. 노란 머리카락과 새붉은 눈동자 대신 풀빛 머리카락과 금색 눈동자가 눈에 들어온다. 익숙한 얼굴이지만 간절히 바라던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게 아쉬운 얼굴일 필요는 없는데.”
“티가 났습니까?”
“아니~ 딱 보면 알지. 얘가 모르겠냐? 너만큼이나 눈치 빠릿한 녀석인데.”
지우스가 해야 했을 대답을 낚아챈 와론은 허공에 서서 히죽댔다. 나견은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소지를 태우는 기간 내내 마음을 정리했다고 생각했지만 한번에 잊기는 쉽지 않았다.
“이제 가지.”
“벌써요?”
“있어 봤자 좋을 것 없잖나. 집도 진작에 다 비웠겠다, 빨리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게 나아.”
“...알겠습니다.”
지우스의 시선이 그를 유심히 살폈다.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허공에서 훌쩍 뛰어내린 와론이 지우스의 어깨에 한쪽 팔을 올렸다.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나견에게 와론의 행동거지며 행색, 특히 저놈의 헬멧은 영 익숙해지지를 않는다. 투구도 아니고 헬멧이라니.
“해 뜨는 것까지만 보고 갈까~”
와론은 아주 예전부터 이어져 온 특유의 예민한 감각으로, 다른 이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잡아낼 때가 있었다. 원한다고 해서 들어주지는 않는다지만. 아주 가끔씩은 이런 식으로 자비롭게 굴기도 하니까. 지우스도 별 말이 없이 태양이 지평선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기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나견은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글쓴이] 문수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