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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나진 나견 논CP

성냥

  비가 내렸다.

 

  어스름한 구름 그림자 아래로 미세한 물방울이 직선을 그리며 눈꺼풀을 스친다. 곧이어 볼과 어깨에도 툭툭 떨어지기 시작했다. 몇 푼 안 되는 지폐가 젖어버릴라, 절반에 절반으로 깎이기 일쑤인 일당을 조심스레 반의 반으로 접어 주머니 깊이 찔러넣었다. 조금씩 굵어지는 빗방울을 피하려 바로 옆에 있던 가게로 잠시 몸을 움직였다. 주변에 서 있다가 난데없이 비를 맞은 사람들은 다 그렇게 했다.

 

 처마 아래로 고개를 숙이고 안으로 들어가자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이 말을 멈췄다. 눈을 가늘게 뜨더니 목소리를 낮춘다. 한둘이 아니다. 이물질을 밀어내듯 날이 바짝 선 공기에 혀라도 잘린 것처럼 숨이 막혔다. 이럴 때일수록 나견은 본인이 제일 잘하는 일을 알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속으로 중얼거리며 숙였던 고개를 치켜들었다. 마치 어깨에 묻은 물방울을 털어내려 잠시 허리를 수그렸던 것처럼, 그런 척을 했다. 고깝게 여기지 않는 눈빛은 여전했지만, 이렇게 행동하면 당장의 해코지는 면할 수 있으니까. 뻔뻔한 행동에 기가 찬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 둘 떨어져나갔다. 안도의 한숨을 작게 내쉬자마자 등 뒤에서 쏘아붙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것도 안 살 거면 나가.”

 뒤돌아보자 눈썹을 잔뜩 찡그린 표정을 지은 가게주인이 팔짱을 단단히 끼고 있었다. 아, 이사람을 잊고 있었지. 영 미움받는 녀석이 본인 영업장에 있어서 득 볼 것이 없는데 거기까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나견은 주머니 속을 더듬었다. 얼마 안 되는 지폐 몇 장이 곱게 접힌 채 손가락 끝에서 맴돌았다.

 나견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채로 가게 진열대 앞을 천천히 걸었다. 어차피 눈총을 받는 상황이니 딱히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사라고 강요하니 뭐라도 집어드는 수밖에. 온갖 물건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곳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한 물건에 잠시 시선이 꽂혔다. 손 안에 쏙 들어오는 크기의 작은 종이상자였다. 겉면을 보니 불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성냥...인가.’

 빗물에 젖은 어깨가 흠칫 떨렸다. 그러고 보니 집 벽난로는 이미 불이 꺼졌을 텐데. 방문을 열면 찬 공기가 훅 끼쳐올 것이다.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은 유독 더 그럴 것이다. 찬 공기는 눅눅하고, 옷은 마르지 않아 계속 체온을 낮출 것이고, 이불을 덮어도 바닥부터 올라오는 냉기에 발이 시릴 것이다.

 그렇지만 나견에겐 그저 살 수 없는 물건일 뿐이다.

 “거기서 눈 떼! 안 팔 거니까.”

 나견의 시선이 성냥을 향해 있는 걸 눈치챈 것인지 주인이 목소리를 높였다. 말하면서 이를 갈았는지 둔탁한 빠드득 소리가 약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나견은 성냥 옆에 있던 다른 물건을 집어들면서 재빠르게 대답했다.

 “...그거 사려던 거 아니에요.”

 “허 참 나...”

 가판대 위에 감자 두어 개를 올려두자 주인은 못마땅한 듯 허공에 헛웃음을 쳤다. 가격이 아슬아슬했다. 주머니 속에서 어느샌가 마구 구겨진 지폐를 거의 모조리 털어냈다. 남은 건 동전 몇 푼과 감자 두 알뿐. 그마저도 바지 양쪽 주머니에 하나씩 쑤셔넣으니 끝이었다. 다 샀으면 나가라는 주인의 명백한 축객령에 간단히 목례를 하고 문을 나섰다. 닫히는 문 틈으로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저 녀석에게도 물건을 팔아주시다니 친절하시네... 아뇨, 그래도 먹고는 살게 냅둬야 하지 않겠어요? 동생도 있으니까. 아, 나진이요...어쩔 수 없겠어요. 문이 닫히고 말소리는 빗소리에 묻혔다. 처마 아래로 빗물이 줄줄 흘러 물웅덩이가 되어있었다. 빗줄기는 창이 바닥에 내리꽂히는 것처럼 우수수 쏟아져 떨어졌다. 꽂히면 아플까, 아프긴커녕 물만 등을 적시고 흘러내리겠지. 뭐야, 너, 아직도 안 갔어? 진짜 무기도 아니니 상처 같은 건 날 리도 없지만 그렇다고 정말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닌데. 몸 위로 떨어지는 물이 얼어붙도록 차갑다.

 하지만 나견은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걸었다. 비 같은 건 오지 않는 것처럼.

 예상대로였다. 집은 추웠다. 문을 열자 찬 바람이 젖은 몸을 훅 스치고 지나갔다. 꺼진 벽난로는 구름 낀 저녁의 푸르스름한 그림자로 어둑했다. 신발을 벗어 뒤집고 털었다. 들어차있던 물이 울컥 쏟아졌다. 젖은 옷과 머리카락을 쥐어짜고 주머니에 들어있던 감자를 꺼내 부엌 식탁에 던졌다. 툭. 묵직한 덩어리를 던졌으니 큰 소리가 날거라 생각했는데 누군가 받아 들었는지 가벼운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리자 젖은 감자를 든 나진이 싱긋 웃고있었다.

 “뭐야, 나견. 너 완전 젖었어.”

 “... 나진! 언제 왔어?”

 “아, 오늘 비 많이 올 거 같다고 집에 일찍 가도 된다고 했거든, 기사님이.”

 아, 그러셔? 나견은 피식 웃었다. 사람 하나 더 있다고 대체 뭐가 그렇게 다른지. 불도 켜지 않았는데 덜 추운 것 같았다.

 “왜 비를 다 맞고 왔냐? 걍 그칠 때까지 어디 있지 그랬어.”

 “아, 안 그칠 거 같길래 그냥 뛰어왔어.”

 쫓겨났다고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나진은 알았다는 의미로 어깨를 으쓱거리곤 손에 쥔 감자를 위로 던졌다 받으며 손장난을 쳤다.

 “이건 오늘 저녁이야?”

 “뭐, 그래야지.”

 “근데 어떻게 구우려고? 지금 불 새로 피워야 해.”

 아, 나견이 짧게 숨을 들이켰다.

 “지금 날씨에 나가서 성냥이라도 사오긴 좀 그렇고...”

 “잠깐만 기다려봐.”

 나진이 제 짐을 풀어 뒤적거리더니 길쭉한 짐을 하나 꺼냈다. 겉을 묶은 헝겊을 풀어보니 은색 칼날이 번득였다. 나진은 재가 가득한 난로 안에 칼을 집어넣더니 벽면의 돌에 내려치기 시작했다. 까드득, 금속성 마찰음에 귀가 아팠다. 날에 거친 면이 계속해서 긁히자 몇 번 반짝이는 빛이 나더니 장작 위로 연기가 조금씩 피어올랐다. 때에 맞춰 숨을 불어넣는 나진의 얼굴 위로 노란 불빛이 옅게 반사되어 비쳤다.

 “이제 됐다.”

 날이 빠져 망가진 칼을 뒤로 빼두며 나진은 이것 보라는 것처럼 재묻은 얼굴로 나견에게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어릴 때와 영락없이 똑같은, 나견과 닮은 얼굴이었다.

 “아, 어. 잘했어.”

 “뭐야. 반응이 떨떠름한데?”

 “...아냐. 진짜 잘했어. 얼른 구워줄게.”

 “난 그럼 쉬고 있을 테니까 갖고 와줘.”

 침대로 누우러 간 나진을 뒤로하고 나견은 불 앞에 앉았다. 타닥, 탁. 타는 장작 소리에 졸음이 쏟아졌다. 환한 붉은 불 사이에 감자를 던져 넣었다. 겉면에 묻었던 물이 열기에 날아가며 껍질이 우그러지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그리고 나견은 생각했다. 성냥 같은 건 살 필요가 없다. 어차피 나 같은 건 살 수도 없다. 그렇지만, 그들이 허락하지 않아도 나는, 나진만 있다면.

 내 유일한 가족, 내 동생.

[글쓴이] 비소 님

너의 문체가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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