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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린닭 논CP
*이 글은 미리보기분 104화(무료분 101화)까지 공개된 작품의 내용과 캐릭터에 기반합니다.
명암
사물의 본질을 드러내기도 하고 숨기기도 하는 불의 양면성. 빛과 그림자.
달이 없는 밤이면 온갖 색조의 별빛이 요란하게 흩뿌려진 하늘 아래 땅에는 자기 손도 알아볼 수 없는 새까만 어둠이 깔린다. 키 큰 나무가 울창한 숲에서는 짙은 녹음이 두터운 천장처럼 하늘마저 덮어버리는 탓에 횃불이라도 들지 않으면 혹시 자신도 모르게 눈이 멀어버린 것은 아닌가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는 순간조차 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말이다. 그러나 기사는 보통의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볼 수 있고 맹수를 겁내지 않으며 추위를 느끼지 않는다. 그렇기에 여행 중인 기사들은 불을 피우지 않는다.
그러니 불씨 하나 없는 어둠 속에서 갑작스레 하늘과 땅 한켠을 불그스름하게 물들이는 화광은 아무리 먼 곳이라도 불길할 정도로 선명하게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오늘밤은 쉬긴 글렀어. 그치?”
나무 위에서 새까만 닭이 몸을 일으켰다. 방향과 거리를 가늠하듯 투구를 비스듬히 기울인 새까만 닭은 곧 고개를 까딱이더니 창을 던졌다. 나뭇가지를 뚫고 하늘로 솟구친 론누가 끼릭 쇳소리를 내며 불빛이 일렁이는 방향으로 꺾여 날아갔다. 새까만 닭은 팔짱을 낀 채 기다렸다.
같은 노래를 일정한 속도로 소리 없이 몇 번째 되뇔 무렵 새까만 닭이 팔짱을 풀었다. 새까만 닭은 밟고 선 가지 아래를 흘끔 보곤, 그대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굵은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바위가 깨지고, 빽빽이 돋은 잎이 터지듯 흩어지는 소리가 한순간에 숲의 저편까지 가로질러갔다. 새까만 닭은 어지간한 기사들도 숨이 찰 속도로 질주하고 있었다.
계곡 두 개와 가파른 산등성이 하나를 가로질러 마주친 조그만 분지에서 불길이 솟구쳤다. 불은 조그만 마을을 휩쓸고 이제 마을을 둘러싼 밭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온갖 것이 타는 냄새와 재와 불티가 섞인 매캐한 연기가 산안개처럼 분지에 고여 시야가 갑갑했다.
새까만 닭은 마을의 진입로를 가리키는 표석 옆에 느긋한 자세로 서 있었다. 연기에 싸인 저편에서는 화마를 등지고 있어 시커멓게 보이는 인영 여럿이 굳은 모습으로 이편을 대면하고 있었다. 하늘 어딘가에서 뚝 떨어진 론누가 새까만 닭의 손아귀로 빨려들듯이 쏙 들어왔다. 새까만 닭은 창을 어깨에 걸치며 고갯짓했다.
“소속. 관등성명. 잘하는 거. 뭐든 자기소개 한번 해봐.”
“무, 뭐요? 우린 어, 이 마을 사람이오. 이재민이라고.”
“불났는데 세간 챙길 시간은 없어도 칼 챙길 시간은 있었나 봐. 거 좋아 보이네. 어디서 뽑았는지 정보 공유 좀.”
무리는 망설이지 않았다. 연기를 가르는 칼날에서 아직 마르지 않은 핏방울이 날렸다. 다음 순간 무리가 거의 동시에 고꾸라졌다. 팔다리가 기괴하게 꺾인 채 눈을 뒤집고 기절한 자들 사이에서 새까만 닭에게 대꾸했던 한 명만은 아직 정신을 유지한 채 틀림없이 부러진 늑골을 부여잡고 주저앉아 있었다. 새까만 닭의 몸에서 상대를 가차 없이 제압한 흔적은 회오리치는 연기를 두른 채 활짝 펼친 날개처럼 붕 뜬 망토자락과 호를 그리며 휘날리는 긴 붉은색의 투구깃 뿐이었다. 새까만 닭은 창끝으로 무리 중 하나가 떨어뜨린 칼을 튕겨 잡아채곤 칼날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흐음~ 역시 관급품이면 중간은 가지.”
“너, 아, 당신, 은, 기사-”
“정답.”
살인자는 말을 맺지 못한 채 쓰러졌다. 새까만 닭은 살인자의 턱을 걷어차면서 부츠에 튄 피를 쓰러진 자의 옷에 대충 문질러 닦고는 연기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갔다. 불길은 피부가 따끔할 정도로 거셌고 연기는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매웠지만 새까만 닭은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두리번거리고 창대로 헤집으며 불타고 무너진 건물 사이를 돌아다녔다.
새까만 닭이 여기저기 그을린 자국과 구멍이 난 망토를 옆구리에 끼고 진입로로 돌아나올 무렵 살인자들은 말을 할 수 있을 만큼 정신을 차리긴 했지만 끙끙거리며 신음할 뿐 쓰러진 자리에서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망토뭉치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새까만 닭은 머리 위에 아지랑이가 언뜻 보일 정도로 달궈진 투구를 고집스레 쓴 채 무릎을 짚고 재 섞인 기침을 토했다. 아직도 물기가 배어 축축한 망토뭉치 속에서는 검댕투성이가 된 어린아이가 쌕쌕거리며 힘겹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한참을 쏟아지던 기침이 겨우 가라앉자 새까만 닭은 땅바닥에 쏟아놓은 기사보급품과 사비로 마련한 의료물품을 뒤적이며 필요한 것을 찾았다. 아이의 호흡이 한결 편안해지고서야 새까만 닭은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살인자들에게 눈길을 돌렸다.
“뭐... 두고 가야겠지.”
새까만 닭은 망토에 감싸인 아이를 안아 들고 달리기 시작했다. 밭의 작물을 모조리 삼킨 불길이 이제는 마을의 경계 너머에서 시작되는 숲의 가장자리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
“그 사람들 도적 아니에요. 어른들이 아니랬어요.”
의식이 돌아온 후 아이가 한 말은 그게 전부였다. 아이는 몸에 둘린 넝마 같은 새까만 망토를 꼭 붙잡고 무릎을 끌어안은 채 이것저것 들어오는 질문에 입을 열지 않았다. 기사보급품인 마법회로로 조그만 모닥불을 일으켰을 때 신기한 듯 잠시 불을 힐끔거린 것 말고는, 내내 땅바닥을 향해 눈을 내리깐 채였다. 새까만 닭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사냥한 동물의 고기를 솥에 쏟아 넣고 털썩 주저앉았다. 그 조심성 없는 태도 탓에 식용과 약용을 구분해 쌓아놓았던 풀무더기가 뒤섞이며 흐트러졌지만 새까만 닭은 지루한 것처럼 머리 위쪽 어딘가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아직 가시지 않은 서늘한 새벽안개에 부드럽게 보글거리며 끓는 죽에서 피어오른 배고픈 냄새가 섞여들 무렵 새까만 닭이 마침내 말을 꺼냈다.
“내가 너를 데리고 다닐 수 있는 처지가 아니야. 임무 중이거든. 무슨 말인지 알겠지?”
“...”
“일단 가까운 마을에 데려다주마. 동쪽과 서쪽, 어느 쪽으로 가고 싶니?”
아이는 눈에 보일 정도로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러나 곧 체념한 듯, 아이는 망토 틈새로 손을 뻗어 왼편을 가리켰다. 동쪽과 서쪽, 아니면 어딘가 다른 곳인지 정확한 방향을 알 수 없는 손짓이었지만 새까만 닭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밥부터 먹자.”
***
기사가 기준이라면 몸을 풀기 위한 가벼운 달리기 정도에 불과한 속도로 이동한 끝에 점심께를 훌쩍 넘기고서야 마을이 나타났다. 이곳의 주민들도 간밤에 산자락과 하늘이 맞닿은 경계의 한켠을 물들이던 화광을 봤기에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산불이 이쪽까지 번지거나 혹은 ‘도적떼’가 여기까지 오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던 주민들은 그날 마을에 나타난 첫 외부인에게 듣고 싶은 것이 많았다. 물론 새까만 닭은 모든 질문에 대답해주는 친절한 사람은 아니었다.
“도적떼? 확실해?”
“그쪽에 나타난다는 소문은 있거든요.”
먼저 질문했지만 도리어 질문을 받은 주민들은 썩 내키지 않아 하는 낯이 되었다. 하지만 새까만 닭에게서 풍기는 폭력을 행사하는 일에 익숙한 자들 특유의 위험한 분위기는 폭력과 거리가 먼 평범한 사람들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것이었다. 주민들은 우물쭈물하며 억지로 웃는 낯을 지었다.
“우물 밑에 숨은 덕에 혼자 살았다니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안됐다고 해야 할지.”
“안타까운 노릇인데 우리 마을엔 저 애 친척이거나 아는 집이 없어서요. 고아들 돌봐주는 데라면 도회지까진 가야 있죠.“
일거리가 많지도 않고요, 라고 쓸데없이 덧붙인 말에는 아직 일해서 생산하는 것보다 먹어서 없애는 것이 더 많은 나이인 어린아이를 부담스러워하면서도 그런 속내를 낯선 이 앞에서 드러내야만 하는 겸연쩍음이 노골적으로 묻어있었다. 그리고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새까만 닭의 투구와 마주하는 것을 피해 사방으로 흩어진 눈들은 막연한 두려움을 띠고 있었다. 산맥 저편 이웃 영지의 소식, ‘도적떼’가 습격해 사라진 다른 마을에 대한 소문, 그러게 왜 그런 데서 살겠다고 고집을 부려, 저 투구씨는 설마 기사일까, 애는 안 돼, 다시 침묵. 낯선 이들이 빨리 떠나길 바라는 무형의 압박은 새까만 닭이 떠난 자리마다 새어 나오는 수군거림과 보급품의 값을 거슬러주며 서두르는 손길 속에서 점점 짙어졌다.
마을을 벗어나 한참을 달린 후에야 밤을 보낼 곳을 정한 새까만 닭은 불을 붙일 마법도구가 몇 장 밖에 남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는 투구의 뒤통수를 긁적이더니 한 장을 뽑아 장작더미 위에 던졌다. 아이는 먹을 것을 채집하러 돌아다니는 동안 야영지 한구석에 얌전히 개켜놓았던 새까만 망토를 다시 이불처럼 몸에 두르고 앉았다.
“아저씨는 기사님이죠?”
나무 위에 론누를 끌어안고 앉아있던 새까만 닭이 흥미롭다는 듯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그 바람에 투구의 턱부리가 조금 불빛에 드러났지만, 새까만 닭의 나머지는 불빛을 가로막는 이파리 무성한 가지의 새까만 그림자 속에 교묘히 숨겨져 있었다. 마치, 풀을 뜯으며 땅에 고개를 처박은 먹잇감을 그 머리 위의 나무에서 도사리며 관찰하는 육식동물 같은. 그 모습을 똑바로 쳐다보기 어려웠는지 머리 위 대신 모닥불을 응시하면서 아이의 눈에 불길이 일렁였다.
“기사님들은 정의로우시잖아요. 복수해주세요.”
잠깐의 침묵 후 새까만 닭이 입을 열었다.
“누구한테? 어린애를 외면한 마을 사람들? 도적이었다가 이재민이었다가 정신없던 병사들? 아님 그놈들을 보낸 영주? 그리고 또-”
“영주님인 거 아셨어요? 근데 왜 영주님 안 잡아가세요?”
아이가 고개를 휙 치켜들었다. 새까만 닭은 손가락을 꼽아가며 게으른 어조로 끊겼던 말을 이었다.
“-또 보자, 국경 지역 영주들로 대리전을 치르는 왕들? 왕들이 사이가 나빠 전쟁이 나든 마을 하나가 지워지든 관심 없는 황제? 구체적으로 말해봐.”
왕과 황제가 거론되자 아이는 입을 벌린 채 어쩔 줄 몰라 했다. 자신이 태어난 조용한 산골 마을에서 벗어나본 적이 없는 어린아이에게 그들은 너무 멀고 거창한 존재들이었다. 새까만 닭은 좍 펼쳐진 다섯 손가락을 가볍게 그러쥐었다.
“말했지. 나 임무 중이라고.”
“그치만 기사님이잖아요!”
“내가 누구한테 뭘 어떻게 해줬으면 하는데? 넌 그 대가로 뭘 치를 거지?”
“아저씨 기사 아니고 용병이에요?”
“기사 맞아. 나는 아저씨 아니고.”
“영주님은 나빠요! 영주님 잡아가주세요! 시키시는 거 다 할게요. 제발 복수해주세요.”
아이는 울먹이기 시작했다. 대여섯 살 밖에 안 된 아이한테서 상상할 수 없는, 뱃속을 할퀴는 것 같은 울음소리였다.
새까만 닭은 흐느껴 우는 아이를 내려다보다가, 턱짓했다.
“그거 탄다.”
수증기가 아니라 허연 연기가 일어나기 시작한 솥에 부랴부랴 물을 붓고 바닥을 긁어내다시피 휘젓는 야단법석이 한바탕 지나갔다. 놀라서 딸꾹질을 했지만 조금은 진정된 아이의 등 뒤로 어느새 새까만 닭이 내려서있었다. 불빛에 비스듬히 드러난 키 크고 거대한 기사의 모습은 늘 두르던 새까만 망토가 없는 탓인지 위압적인 분위기가 평소보다 옅었다.
움찔 물러서는 아이를 제지하지 않은 채 새까만 닭은 천천히 몸을 낮춰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아이의 낯에 두려워하면서도 일말의 기대감이 어리기 시작했다. 새까만 닭은 아이의 볼에 묻은 검댕을 반장갑 낀 손등으로 훔쳤다.
“빨리 먹고 자라. 내일부터 좀 빡세게 달릴 거거든.”
“그럼 복수해주시는 거예요?”
“아닌데? 나 임무 중이라니까? 니젤. 제국 수도로 갈 거야. 나라면 눈 깜짝할 사이에 날아갈 수 있지만, 과연 너도 따라올 수 있을지~?”
아이의 낯이 분노와 배신감으로 일그러졌다. 아이는 그때까지 몸에 칭칭 감아 두르고 있던 망토를 벗어 사납게 패대기치고 모닥불 반대편으로 건너가 무릎을 끌어안고 앉았다. 감히 기사를 노려볼 수 없어 대신 모닥불을 노려보는 눈은 이대로라면 저녁도 먹지 않고 자지도 않겠다고 고집을 부릴 기세였다. 어린아이가 어른, 그것도 기사를 상대로 할 수 있는 저항이란 그런 것뿐이었다.
새까만 닭은 말없이 그을음과 먼지에 절여져 거의 잿빛 넝마처럼 보이는 망토를 주워 걸치고 나무 위의 그림자 속으로 돌아갔다.
***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정은 새까만 닭의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보다 정확히는 새까만 닭이 염려했던 대로, 였다. 습격당해 불타는 마을로 내달리던 때처럼 혼자 이동한다면 달랐겠지만, 지금 새까만 닭은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 날씨마저 새까만 닭의 편이 아니었다. 불이 나던 날의 구름 한 점 없던 하늘이 거짓말인 것처럼 두터운 먹구름이 지평선의 저편에서 이편까지 빈틈없이 밀려 들어오더니 기어코 무거운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새까만 닭의 등에 업힌 아이는 그 비를 고스란히 맞을 수밖에 없었고, 거기에 나는 듯이 달리는 기사의 속력이 더해지자 조금 선선한 정도인 공기는 살을 에는 얼음이 되어 아이의 체온을 빼앗아갔다.
왕국 간의 분쟁지역을 벗어나는 길이 예정보다 하루쯤 지체된 채 버려진 사냥오두막에서 비를 피하고 있을 때, 완전무장을 갖춘 군인이 무기를 잡지 않은 두 손을 드러내보이며 나타났다. 다소 허름하지만 꼼꼼하게 관리한 갑주와 빈틈이 없는 몸가짐, 잔뜩 긴장한 채 어떤 각오가 되어 있는 눈에서는 경험 많고 능력도 어느 정도 인정받지만 그다지 지체 높은 출신은 아니라서 어리석은 주인을 만나면 대접이 딱 그 정도인 자라는 인상이 풍겼다. 다시 말해, 새까만 닭 같이 악명 높고 종잡을 수 없으며 살인에 능숙한 자에게 잘못 걸려도 괜찮은 패.
이쪽에서 그쪽에 대한 판단을 마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이쪽에 대한 판단을 마친 듯, 군인은 부지깽이로 무심하게 불을 쑤시고 있는 새까만 닭에게 곧바로 다가가 약간의 거리를 두고 서서 공손히 예를 올렸다.
“기사 새까만 닭님께 인사드립니다. 이런 벽지에서도 위명이 높은 기사님의 존안을 직접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또한-”
“됐고, 무슨 용건이실까?”
문간에서 보면 문을 등지고 앉은 새까만 닭의 큰 체구와 낮인데도 어둑한 실내의 그늘로 가려진 탓에 불 건너편에 몸을 옹송그리고 누운 아이는 조금 늦게 눈에 들어왔다. 군인은 아이를 힐끔 보곤 이곳에 새까만 닭만 있는 것처럼 주의를 집중하며 천천히 말을 골랐다.
“듣던 대로 명쾌하시군요. 그럼 제 주인의 요청을 전하겠습니다. 여기서 며칠 떨어진 거리에 있는 마을을 습격해 살인하고 불을 지른 도적들, 그놈들을 제압한 분이 기사님이시지요? 놈들의 우두머리는 저희가 신병을 확보해뒀습니다. 그자를 부디 기사님께서 직접 처단하여 정의를 바로 세워주십시오.”
“그리고?”
“..그리고 저희 영주님께서 고명하신 기사님께 어울리는 대접을 할 기회를 허락하시길. 영주님께서는 안타깝게도 도적의 습격으로 고향과 부모를 잃은 아이의 소식을 듣고 친히 거두길 희망하십니다. 하지만 기사님께서 직접 보호하시던 자를 저 같은 낯선 자가 갑자기 데려가겠다고 하면 안심이 되지 않으시겠지요. 그러니 제가 기사님과 기사님께서 보호하시는 저희 영지의 주민을 성까지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마침 동행께서도 몸이 좋지 않으신 듯한데 영주님의 성에서 치료받고 휴식도 취하실 수 있도록 저희가 조치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군인은 눈을 내리깐 채 곁눈질로 새까만 닭의 기색을 살폈다. 새까만 닭은 흐음 하고 콧소리를 낼 뿐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어색한 공기 속에서 너와로 된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와 젖은 나뭇가지 타는 소리가 따가울 정도로 귀를 찔렀다. 빗물이 새는 천장 구석에서는 퀴퀴한 곰팡내가 풍겼고 불 위에서 조용히 끓는 물에서는 잠을 쫓는 볶은 콩으로 끓인 차 특유의 구수하고도 씁쓸한 내음이 불에서 멀리 치워둔 잔에 담긴 쓴 풀을 끓인 냄새와 섞여든다. 길어지는 나른한 침묵을 더는 참을 수 없게 된 군인이 뭔가 말을 더 얹으려고 눈치를 보기 시작할 무렵 새까만 닭이 하품을 하며 느긋하게 기지개를 켰다.
“흐아암, 걔들 여러 명이었는데 하나만 잡은 거야?”
“정의를 요구하는 주민들의 요구가 강력하여 모두 신속하게 처단했습니다. 다만 영주님께서 우두머리 한 놈만은 기사님께서 직접 처단하시는 게 옳다 여기시어-”
“그 ‘도적’의 우두머리란 놈, 뭐 하는 놈이야? 훈련받은 것 같던데.“
“아, 이 부근 마을 출신으로 영주님의 후원을 얻어 수년 전 견습기사가 되는 행운은 누렸지만 결국 기사는 되지 못한 자입니다. 끝내 기사가 될 수 없었던 처지를 비관했던 모양입니다. 전부터 영주님의 근심이고 영지의 골치거리였지요. 그자의 이런 과거 행적도 기사님이라면 놈을 직접 처단하시고 싶어 하실 이유가 될 거라고-”
“있잖아, 들어봤는지 모르겠는데 세상에는 마법에 미친 어떤 사이비 집단이 있거든. 걔들은 절박한 어린애들을 도와주는 척 끌어들여 약점 잡고 더러운 일에 부려먹어. 그러다가 쓸모가 다하면, 팽하지. 그런 비슷한 거 들어본 적 없어?”
“사이비요?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저희 영지에는 그런 놈들은 없습니다. 기사님께서 맡으신 임무와 관련 있다면 저희가 최대한 협조해드리겠습니다.”
하던 말이 새까만 닭의 고의적이기까지 한 끼어들기로 계속 끊겼지만 군인은 표정이 없는 낯으로 참을성 있게 대답했다. 군인의 낯에 드리워진 음영만이 판자 틈으로 새어드는 바람에도 일렁이는 불빛에 따라 만화경을 돌리는 것처럼 다채롭게 바뀌었다. 새까만 닭은 앉은 자리에서 우둑 소리가 나도록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그럼 됐어. 거래 좋지. 근데 좀 단순하게 가자고.”
“말씀하십시오.”
“첫째, 너희가 신병을 확보했다는 놈. 그놈은 내가 데려간다. 둘째, 너네가 와라.”
“예? 그 말씀은-”
“내가 너네 성까지 애를 데려다줘야 그 ‘도적’을 넘겨주겠다는 거잖아. 내가 왜?”
“하지만 기사님, 저희 영지를 방문하셨으니 기사님께 격에 맞는 대접을 해드려야-”
“됐고요, 가보세요. 이틀 준다.”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투구 너머에서 새까만 닭이 씨익 웃는 듯했다. 군인은 어쩔 수 없이 예를 올리고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오두막을 떠났다. 문이 열리면서 들이닥친 쌀쌀한 바람에 아이가 움찔 뒤척였다. 맞은편에서 새까만 닭은 생각에 잠긴 듯 이미 불길이 강하게 살아난 모닥불을 계속 들쑤시고 있었다.
***
그로부터 하루하고 반나절이 지난 밤, 이제는 기세가 약해진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숲에서 야영하던 병사들이 습격당했다. 가장 먼저 정신이 든 병사는 호송하던 죄수가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빗물로 질퍽해진 땅바닥에는 죄수의 것인 듯한 발자국이 갈팡질팡하다가, 어느 순간 사라져있었다. 그곳에 습격자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범죄현장에서 기사에게 제압당해 골절상을 입고 턱이 으스러지다시피 한 꼴로 발견된 후 며칠째 아무것도 입에 넣지 못했던 자가 혼자 힘으로 달아날 리는 없었다. 상황을 알리려 사냥오두막으로 먼저 사람을 보냈지만, 그곳 역시 며칠 전까지 불을 피웠던 흔적만 남은 채 텅 비어있었다.
지루한 산골에서 모처럼 자극적인 소식이 되었던 그 이야기를 소리죽여 소곤거릴 때마다 사람들은 ‘기사사냥꾼’에 대해 아는 온갖 흉흉한 소문을 덧붙이며 혀를 내둘렀다. 모두들 내색하지 않았지만, 지금쯤이면 영주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
성긴 구름 틈 사이로 반달보다는 조금 더 부풀어오른 이지러진 달이 언뜻 드러났다가, 다시 숨었다. 습격이 있었던 그믐밤으로부터 벌써 이만큼 날짜가 지나있었다.
그날 이후로 아이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동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새까만 닭의 등에 업혀도 쉬기 위해 땅바닥을 딛으면 거리를 둔 채 결코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새까만 닭도 말이 없었다. 아직 감기기가 있는 아이를 돌보면서 동시에 몸이 성치 않은 죄수까지 감시해야 했지만, 새까만 닭은 임무와 관계없는 일을 떠맡아 여정이 자꾸 지체되는 데서 비롯되었을 불편한 심기를 의외로 잘 억누르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그랬다.
아이가 금방 잠든 것을 확인한 후 새까만 닭은 토굴 구석에 팔이 뒤로 돌려 묶인 채 주저앉아 있던 죄수를 툭 차서 일으켰다. 죄수는 앓는 소리를 흘리며 새까만 닭이 뒤에서 지시하는 대로 비척비척 걸어갔다.
오늘의 야영지가 된 조그만 토굴에서 새어 나온 불빛이 스치면 살을 찢어놓을 날카롭고 메마른 바위 사이로 아른거렸다. 왕국 간의 분쟁지역에서 멀어질수록 수목이 띄엄띄엄 흩어지더니 어느 틈에 시커멓게 탄 죽은 나무와 짙푸르지만 아직 키가 작은 수풀이 듬성듬성한 황무지를 지나고 있었다. 하루쯤 더 달리면 다시 숲이 시작되고, 곧 니젤로 향하는 잘 정비된 도로에 들어설 것이다. 그 지역부터는 황제의 직할지로서 기사나 병사가 주기적으로 순찰을 돈다. 다시 말해 기회가 있다면, 오늘이었다.
죄수의 오금을 걷어차 무릎 꿇린 새까만 닭은 그 앞에 론누를 비껴들고 서서 손가락을 하나씩 꼽기 시작했다.
“마을사람, 병사, 영주, 왕, 황제.”
활짝 펴진 손바닥이 검지 하나만 남기고 다시 접혔다. 그 손가락으로 새까만 닭은 죄수를 가리켰다.
“병사.”
“기, 기사, 사냐꾸.”
죄수는 새까만 닭의 그 악명 높은 ‘소문’을 내뱉고 눈을 내리깔았다. 부러진 턱뼈가 아직 붙지 않은 탓에 죄수는 제대로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사람이 품은 생각과 마음은 언어 이외의 것으로도 전달된다. 죄수는 다친 몸으로 치료도 받지 못하고 포박된 채 병사들에게 이송되다 폭우로 기온이 떨어진 숲에서 나무 위를 평지처럼 달리는 기사의 손에 짐짝처럼 들려왔고, 황무지에서부터는 줄에 끌려가다시피 하면서 기사의 속력에 맞춰 제 발로 뛰어야 했다. 견습까지는 갔던 자였기에 그래도 버텨냈지만 죄수는 지극히 지쳐 있었고, 어느 정도는 포기한 듯했다. 새까만 닭은 죄수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까딱였다.
“뭐라는지 모르겠네~ 근데 너, 기사냐? 기사가 그런 짓 하는 걸 눈앞에서 보면 보통의 기사들은 그 자리에서 명예 어쩌고 난리를 칠 것 같긴 해. 그럼 기사가 아니라서 다행인가?”
“...”
“근데 내가 보통의 기사는 아니거든.”
제각기 조곤조곤 울던 황무지의 조그만 생물들마저 일제히 숨을 죽인 것 같다. 새까만 닭은 태평했지만, 그의 말은 이미 그가 자랑하는 나린기의 창날과도 같았다. 죄수는 허옇게 질린 채 보이지 않는 창에 몸을 관통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부들부들 떨었다.
“주기, 꺼에여?”
“글쎄~ 어떻게 할까?”
“다, 신드른, 체호는, 해도, 시, 시파는, 모해.”
“응 안 걸리면 돼~”
“나, 즈어, 증어, 하 수 이서여. 여주니, 여엉주노, 놈, 며, 명, 령.”
퍼억! 죄수는 숨이 턱 막힌 채 눈물을 흘리며 잿가루가 풀썩 이는 바닥에 엎어졌다. 새까만 닭이 창대로 후려친 곳은 그날 죄수의 늑골을 부러뜨린 곳과 정확히 같은 위치였다.
“살인자는 매달아도 연장을 매달 순 없다, 뭐 그런 거? 이 새끼 진짜 형편없네. 너네가 잘못이 없다면 그 사람들은 뭐, 혼자서 칼 맞고 불타 죽기라도 했다는 거냐? 야. 똑바로 앉아.”
죄수는 고통스럽게 헐떡이면서도 무릎으로 기며 어떻게든 앉으려 애썼다. 새까만 닭이 화를 삭이려는 듯 서성이다가, 결국 참지 못한 것처럼 론누를 크게 휘둘렀다. 죄수의 머리칼 몇 가닥을 자르며 뻗어나간 힘이 뒤편에 바람막이처럼 겹겹이 둘러선 바위를 종잇장 베듯 갈라버렸다. 사람의 키보다 높다랗던 바윗덩이들이 한순간에 자잘한 돌멩이로 깨져나가며 무너져내린다. 발을 붙인 땅이 약한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우렁우렁 울린다. 죄수에게 적중했다면 즉사시켰을 공격이었지만, 새까만 닭에게는 그저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한 불한당이 발을 쿵 구르는 정도의 행동이었다.
“아~ 아! 괜히 그때 성질난다고 차버려서 귀찮게 됐어. 그치? 아픈 애 계속 때리면 나만 나쁜 놈 같잖아~ 간단히 끝내자고.”
새까만 닭은 엉거주춤 몸을 낮추며 론누를 들지 않은 팔을 죄수의 어깨에 친근하게 둘렀다.
“내가 여기서 너를 죽이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대봐.”
“네?”
새까만 닭의 투구가 휙 돌아갔다. 토굴로 향하는 길이 놓인 좁다란 바위틈에 아이가 서 있었다. 새까만 닭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아이는 흠칫 뒷걸음질 치다 울퉁불퉁한 바닥을 잘못 딛고 휘청였다. 기사만이 가능한 경이적인 속도로 새까만 닭이 뛰쳐나갔다. 날카로운 바위 위로 넘어지는 아이를 낚아채면서 새까만 닭이 바위에 등부터 부딪쳤다. 바로 근처에 낙뢰가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머릿속이 멍멍해지는 폭음이 터졌다.
바위가 찰흙 덩어리라도 되는 것처럼 반쯤 파묻힌 채 새까만 닭은 아이를 품에서 점잖게 밀어냈다. 아이는 자신이 무슨 일을 당할 뻔했는지는 짐작도 못한 채 그저 마법처럼 갑자기 다가온 기사와 바위가 깨지는 굉음에 놀라 얼어붙어 있었다.
“너 뭐 하는 거냐? 안 자면 키 안 큰다?”
“잠이 안 와서… 근데 어른들이 아무도 없어서…”
“앗. 그건 우리 잘못 인정. 근데 저기서 여기까지 잘도 찾아왔네.”
“소, 소리가, 그리고 모자가 달님 같아서…”
비구름으로 닦여진 하늘 아래 새까만 닭의 회백색 투구는 반쪽짜리 달이 쏟아낸 빛이 깃들어 마치 지상에 떨어진 달의 나머지 조각처럼 보였다. 비반사 처리가 된 재질이라도 이곳에서는 두드러질 수밖에 없었다. 숲이 있었던 자리는 작년에 일어난 산불의 흔적으로 하늘을 향해 휑하니 열린 채 거뭇한 재에 덮여 있었기에. 새까만 닭은 표정을 읽을 수 없는 그 투구를 기묘한 각도로 비스듬히 기울이더니 에구, 하고 넋두리 같은 신음을 뱉곤 온몸에 뒤집어쓴 바위부스러기와 먼지를 털기 시작했다.
새까만 닭이 아이에게 할 말을 찾는 것처럼 잠시 침묵한 사이 아이는 바닥에 무릎 꿇은 재투성이의 죄수를 쳐다보았다. 마을이 불탄 그날 하룻밤 만에 십수 년은 나이를 먹어버린 아이의 눈앞에서 죄수는 새까만 닭이 겁을 주던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로 고개를 수그렸다. 죄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아이가 말했다.
“기사님, 이제 복수해주실 거에요?”
“쟤는 영주가 아닌데.”
“그치만… 저 아저씨 나쁜 짓 했잖아요. 저 아저씨도 벌 받아야 정의로운 거잖아요. 기사님 제발 복수해주세요….”
아직 어른처럼 유창한 언어를 구사하거나 행간까지 읽어내야 하는 복잡한 말을 하진 못하지만, 아이의 생각은 분명했다. 한편으로 아이이기 때문에 모호하기 짝이 없는 형태로 발화된 말은 얼마든지 아이의 생각과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었다. 약속, 맹세, 기어스, 명예와 정의, 세상의 평. 기사는 온갖 형태의 말에 구속되지만 그 말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행동하는가는 온전히 그 기사에게 달려있다. 그리고 새까만 닭은 방금 전까지 몸이 아픈 죄수를 고양이가 잡아놓은 쥐를 갖고 놀듯 을러대며 이 자리에서 죽일 것처럼 굴고 있었다. 새까만 닭이 침묵하는 그 몇 초 동안 땅에서는 사람과 아직도 숨을 죽인 조그만 생물들이, 하늘에서는 각자의 자리에 창백하게 얼어붙은 달과 별이, 모두가 그를 기다리는 듯했다.
새까만 닭은 죄수에게 다가가더니 뒷덜미를 잡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자신이 몸으로 바위에 부딪치면서 약간 틈새가 넓어진 길을 따라 잘 걷지 못하는 죄수를 질질 끌다시피 데려갔다. 아이는 황급히 새까만 닭에게 달려가 넝마나 마찬가지인 망토자락을 움켜잡고 그의 긴 다리가 성큼성큼 뻗어가는 보폭을 잰걸음으로 쫓아갔다.
“어디 가세요? 어디로 데려가요?”
“말했잖아. 수도. 황제가 있는 곳 말이야. 거기서 얘를 어떻게 할지 결정할 거다. 그 영주가 어떻게 될지도 그때 가면 알게 되겠지.”
“수도가 복수해주는 거예요?”
“글쎄~ 밥 잘 먹고, 잠 잘 자고, 약이 써서 맛없어도 안 남기고 다 먹으면?”
아이는 부모나 주위의 어른들이 그 나이대의 아이들에게 인사말처럼 건네는 그 잔소리가 어떻게 복수와 연결된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어 완전히 불신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렇다고 딱히 기사의 말에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설령 그에게 반발하더라도 어린아이로서는 빠르게 멀어져가는 어른으로부터 떨어져나와 이 험악한 벌판에서 혼자 길을 찾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이는 마지못해 걷다가 뛰기를 반복하며 새까만 닭을 뒤따랐다.
죄수는 아픈 몸을 웅크린 채 불빛이 닿지 않는 토굴 구석에 숨듯이 쓰러지고 아이는 잠을 이루지 못해 칭얼거리며 뒤척이는 동안, 새까만 닭은 토굴 중앙에 기세를 죽여 조그맣게 피워둔 모닥불로 걸어갔다. 그 주변에 흩어진 집기를 살펴본 새까만 닭은 곧 약초 달인 물이 반쯤 남은 조그만 냄비에서 모래알 크기로 깨져나간 볶은 콩 조각처럼 생긴 것을 건져냈다. 손끝을 튕겨 조각을 불 속으로 날려버린 새까만 닭은 냄비를 뒤집어 안에 든 물을 쏟아버렸다. 그리고는 아직도 잠들지 못한 게 분명하지만 어른들로부터 등 돌린 채 누워있는 아이를 잠시 쳐다보더니, 토굴의 입구를 향해 돌아섰다.
“난 세상에 복수를 막을 수 있는 말이란 게 있을지 모르겠다. 소중한 것을 잃어본 적이 없는 놈들은 복수를 구하는 심정도 그 방법에 대해서도 상상력이 없어. 그런 걸 생각할 일도 없으니까. 그러니 무슨 소릴 지껄이든 온전히 납득시키진 못하지.”
입구에 다다른 새까만 닭은 불을 등진 채 바닥에 편안히 주저앉았다. 평범하게 불침번을 시작하는 사람의 모습이었지만, 어찌 된 까닭인지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올려다보기 위해 불빛을 피하는 모습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가 보는 앞이기 때문이라면-”
새까만 닭은 어깨너머로 당신을 돌아본다. 투구 속의 드러난 적 없는 얼굴이 희미하게 웃는 듯하다.
“그래. 정답이다.”
***
대장간 그노제스.
무수한 대장간이 개업했다가 폐업하는 제국의 수도에서 500년을 살아남은 이곳은 최초의 마스터피스가 탄생한 특수제작무기의 명가다. 단순히 기능이 추가된 무기를 원하는 일반인부터 제2의 영웅 검붉은 하마가 되기를 꿈꾸는 기사에 이르기까지 무기를 만지는 모든 집단과 인맥이 있으며, 그중에는 수십 년, 수백 년째 대를 이어 내려오는 관계도 있다. 개중에 귀족도 있음은 물론이다. 그노제스의 배경은 튼튼했고 어지간한 귀족이라도 그럴싸한 명분 없이 그노제스의 대장장이와 도제를 함부로 대했다간 어디서 어떤 형태로 불이익을 겪을지 몰랐다. 이곳에서 일을 배우던 아이가 대장장이 일이 적성에 맞지 않는다면 그노제스와 거래하는 재료 상인 등 관련 업계에 소개장을 줘서 독립하게 해주는 등, 도제에 대한 대우가 제법 좋기로 유명하기도 했다. 생존자이자 목격자이기 때문에 고향에 돌아갈 수 없게 된 고아에게는 이곳보다 나은 피난처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아이는 습자책을 쥔 채 반쯤 꾸벅거리고 있었다. 그 옆에서 조금 더 나이 많은 도제 둘이 건성으로 책을 읽다가 자기들끼리 낄낄거리며 장난을 쳤다. 듣기로 아이가 불을 다루거나 재료, 도구를 만지기엔 아직 너무 어리기에 낮에는 대장간 안쪽에 있는 도제들의 생활공간에서 청소 같은 잡무를 시키고 밤에는 글자나 셈하는 법 같은 기본적인 공부를 가르친다는 듯했다.
아이들이 있는 위층에서 내려와 보면 곧 잠자리에 들 시간임에도 주문이 밀려 잔업 중인 대장장이들이 눈을 태울 것처럼 활활 타오르는 불꽃 앞에서 귀가 아플 정도로 망치를 휘두르며 불똥을 튀기고 있었다.
새까만 닭은 비어있는 모루 옆의 상자에 걸터앉아 대장장이들의 작업을 구경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강렬한 화광을 받으며 투구부터 녹색의 목걸이, 부츠에 이르기까지 전신이 발그레한 불빛으로 부드럽게 물들자 특유의 위압적이고 위협적인 분위기가 누그러지고, 심지어 평화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의 등 뒤에는 어떤 빛에도 물들지 않는 새까만 그림자가 망토에서부터 날개처럼 뻗어나와 천장까지 사납게 드리워져 있었다.
마치, 어느 쪽이 진짜 새까만 닭인지 맞춰보라고 놀리는 것 같다.
나는 어둠에서 벗어나 새까만 닭의 옆에 나란히 섰다. 새까만 닭은 미동도 하지 않았지만 투구의 그늘 속에 숨은 눈은 아마도 위층에서 내려온 때부터 내 움직임을 샅샅이 주시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자들에게 약속을 해놓고 지키지 않은 거, 명예롭지 못했던 것 아닌가.”
사기 아닌가, 라고 말할 뻔한 것을 발화 직전에 간신히 돌려 말했다. 새까만 닭은 무슨 말인지 이해해보려는 듯 침묵하다가, 불현듯 상체를 흔들며 소리 내어 껄껄 웃었다.
“뭐야! 그땐 아무 소리 안 했으면서. 이만큼 시간이 지났는데 갑자기 분해졌냐?”
“그건 아니고. 누가 추궁할 경우 네가 어떤 논리로 변명할 건지 궁금한 것뿐이다. 그때 내가 끼어들지 않은 이유는 너도 잘 알 텐데.”
“이런, 그 못생긴 모자 아래의 조그만 머리로 추측하지 못할 정도의 일은 아닌 듯한데~”
다른 임무에 홀로 나섰다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변수가 발생한 바람에 다치고 갇혀있던 나를 구출하러 온 자가 하필이면 그 새까만 닭이란 걸 알게 된 순간 나는 저 악명 높은 기사가 실제 임무에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움직일지 궁금해졌다. 거북이님이 나를 구조하는 임무의 적임자로 그를 택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만, 이렇게 된 김에 내 눈으로 그의 행동을 목격하고 그의 사고의 결을 느끼고 싶었다. 어차피 기어스 때문에 견습 수준으로 약해진 몸은 회복력마저 크게 저하되어 행동의 범주가 제약될 수밖에 없었거니와, 알아둬야 나도 그를 유리한 위치에서 상대할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의료적 조치를 취하느라 바쁜 새까만 닭의 팔목을 붙잡고 비몽사몽 중인 환자의 헛소리처럼 내기를 걸었다. 새까만 닭의 호위를 받아 수도로 이동하는 동안 나는 그가 하는 모든 행동을 관찰할 것이며 그 역시 내 앞에서 숨기는 것이 없어야 할 거라고. 그 대신 그가 무슨 짓을 하든, 나는 관찰만 할 뿐 결코 끼어들지 않을 것이며 그의 임무가 종결된 후에는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않겠노라고. 수도에 도착할 때까지 한 번이라도 내가 그가 만들어낸 장면에 허락 없이 끼어들어 모습을 드러내게 만든다면 새까만 닭이 이기고, 그렇지 않는다면 내가 이긴다는 조건이었다.
처음에는 내가 실패한 임무의 뒤처리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었다. 애초에 사건이 일어나지 않으면 새까만 닭이 돌발행동이든 기행이든 저질러 나를 자기 뜻대로 휘두를 계기 자체가 만들어질 수 없다. 내기는 새까만 닭 같은 영리한 자가 왜 순순히 수락한 건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처음부터 나에게 유리했다. 그러다 우연히도 –차마 운 좋게도, 같은 표현을 쓸 순 없다- 불타는 마을을 발견하면서 상황이 바뀐 것이다. 새까만 닭이 생존자를 수색하는 동안 제압된 살인자들을 심문하고, 그가 자리를 비우면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이자 피해자 유족인 아이를 돌보고, 그에게 박살나고 납치까지 당한 죄수가 거친 여행 중에 죽진 않도록 감시하고, 이따금 그가 먼저 내 생각을 물으면 대답하고. 그리고는, 새까만 닭이 눈앞에서 무슨 짓을 벌이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기사를 만날 일이 드문 시골 사람들은 무기가 없고 새까만 닭의 옆에 있으면 체구마저 한참 작아 보이는 나를 시종이나 힘없는 피보호자 정도로 여겨 없는 사람처럼 무시하고 ‘기사’ 앞에서 하지 않을 말을 쉽사리 흘렸기에 편리한 점도 있었지만.
내가 새까만 닭과 잠시 동행하던 나날을 반추하던 것처럼 새까만 닭도 그때의 일을 되짚어보고 있었을까. 잠시간의 침묵 후 새까만 닭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뭐, 엄밀히 말하면 약속을 어긴 것도 사기를 친 것도 아냐. 난 그쪽이 잡은 ‘도적’을 데려가겠다고만 했지, 내가 데리고 있던 애를 넘기겠다고 한 적은 없거든.”
“그놈들한텐 네가 오두막에서 죄수와 아이를 교환하기로 약속한 것처럼 들렸을걸.”
“내가 왜? 난 걔네한테 내 쪽으로 오라고만 했는데? 너도 듣고 있었잖아. 내 쪽에서 하겠다고 확실하게 약속한 건 죄수의 신병 인수뿐이었다고.”
본 사람이 없다는 투구 너머의 낯이 빙글빙글 웃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른 기사가 지켜보는 앞에서도 기사답지 않게 교활하고 태연히 명예를 무시하는 놈. 새까만 닭이 그것과 맞바꾼 것은 하룻밤 만에 자신이 알던 하나뿐인 세계를 빼앗긴 아이와 남에게 이용당하는 삶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젊은이의 목숨이었다.
갑자기 시선이 느껴져 눈을 치뜨니 새까만 닭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을 드러내고 말았던 모양이다. 낯을 굳히며 용광로에서 끓어오르는 불꽃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건 그렇고, 궁금해할 것 같아서 소식을 전해주러 왔다. 거북이님의 말로는 역시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에는 왕국 간의 분쟁이니까. 황제 직속인 우리 기사들이 황제의 명도 없이 끼어들 일은 아니라는 거지.”
“수도에는 뭐가 됐든 기사가 나서는 걸 싫어하는 놈들도 적잖이 있고 말이지.”
“게다가 재판에 넘기면 그쪽 영주들까지 호출되어야 하니 판이 너무 커져서, 그냥 정체불명의 도적떼가 저지른 흔한 비극 정도로 묻어버리자는 분위기야.”
“그 전직 견습이라던 놈은 어떻게 한대?“
“기껏해야 서쪽다리 같은 교전지역에서 죽을 때까지 병사로 복무시키는 정도가 최선일 것 같다고 하시더군. 그자도 습격을 지시한 건 영주인데 혼자 뒤집어쓰고 도적으로 몰려 처형당하느니 그편이 조금이라도 명예롭게 속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고 해.”
그자를 정식으로 처벌하려면 재판이 필요하다. 기사는 범죄자를 체포할 권한은 있지만 심판할 권한은 없으니까. 물론 사람들은 “명예롭고 정의로운 기사”에 열광해서 기사가 흉악하다고 판단한 범죄자를 그 자리에서 직접 처단하기까지 하면 기뻐하지만, 원칙은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재판을 열어봤자 이런저런 높으신 분들의 계산과 연줄이 얽혀 자칫 그자 하나만 흉악범으로 처단되고 더 큰 범죄는 은폐될 판이었다. 영주가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할 수 있는 죄수를 굳이 돌려받거나 쫓아와서 처치하려 들지 않은 것은 첫째로 새까만 닭이 같은 기사들 사이에서도 대적할 수 있는 자가 손에 꼽힐 만큼 강하기 때문이지만, 설령 그가 죄수를 죽이지 않고 수도에 데려가도 시스템을 이용해 얼마든지 일을 덮어버릴 수 있다는 자신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흔히들 기사는 용을 대적할 수 있는 자라고 한다. 하지만 세상에는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있고, 그것을 깨닫지 못한 기사는 이른 죽음을 맞기 십상이다. 이른 죽음을 피한 얼마 안 되는 기사 중 하나인 새까만 닭은 사건의 뒤에 귀족들이 얽혀있는 걸 짐작한 때부터 이렇게 되리라는 걸 예상했다. 그렇기에 죄수가 사건의 직접적인 가해자일 뿐만 아니라 영주의 범죄에 대한 증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그자를 살려둬야 할 이유를 설득할 수 없었다.
“그때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내가 한 가지가 마음에 안 들어. 너 말이야, 날 말려보겠다고 애를 끌어들인 것까진 좋은데~ 애가 자기가 뭘 먹었는지도 모르게 한 거. 좀 그렇다?”
그날 밤 새까만 닭이 돌발행동을 저지를 가능성이 높았기에 만일을 위해 아이가 완전히 잠들진 못하도록 약초를 끓이면서 조금 손을 썼던 것 말인가. 알면서도 넘어가주기에 끝난 일이라 생각했는데.
“그땐 아무 소리 안 했잖아. 이제 와서 갑자기 분해졌나?”
“분하기보단, 거슬리는 거지. 너, 수단 방법 안 가리는 편이지? 원래도 약했는데 그 ‘힘’ 때문에 보통의 기사들처럼 무작정 부딪치고 볼 수 없으니까.”
“사람을 수단으로 쓴 게 불쾌했나? 네가 할 말은 아닐 텐데. 너도 그 죄수의 목숨으로 나를 시험했잖아. 아이가 제때에 나타나지 않았고 나도 끝까지 움직이지 않았다면 그자를 죽일 작정이었나?”
“글쎄? 어땠을 것 같은데?”
죄수가 살아있든 죽어있든 별 의미가 없다면, 새까만 닭은 적당한 이유를 들어 어느 선택이든 모두 가능했다. 새까만 닭이 정말 관심 있었던 것은 내기 때문에 행동이 제약되어 있으면서도 죄수를 죽이고 싶지 않아 했던 내가 그가 낸 문제에 어떤 답안을 제출하는가였다. 그 답안은 어설픈 내기의 성패를 넘어 ‘기사사냥꾼’이 기사 담청색 기린에 대해 내리게 될 판단의 근거 중 하나가 될 터였다. 나는 새까만 닭에 대한 소문이 아니라 며칠간 동행하며 내가 직접 목격한 그 사람의 행동만으로 그를 예측하고 판단해야 했다.
“아이가 네 앞에 나타나게 하는 것, 그 방법뿐이라고 생각했다. 나로선 남들이 뭐라고 지껄이든 너는 기사라는 걸 믿어야만 했다.”
내가 본 새까만 닭은 폭력을 행사하기로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잔인해지면서도, 정의를 요구하는 어린아이에게 그것이 목적 없는 헛된 폭력과 다르지 않을 수 있음을 굳이 알려주고 싶지 않아 하는 자였다.
새까만 닭은 역시 위험한 자였다. 하지만 세간의 소문처럼 자연재해마냥 불가해한 혼돈 같은 것은 아니었다. 새까만 닭에게는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여느 기사가 그렇듯 어떤 규칙과 신념이 있다. 규칙과 신념이 있는 자는 예측할 수 있고, 통제도 할 수 있다. 그 점을 생각할 때마다 소리라도 지르고 싶어진다. 흥분되는 걸 참기가 어렵다.
내 대답을 들은 새까만 닭은 천천히 몸을 뒤채며 다리를 꼬았다. 새까만 닭의 저 몸짓은… 짜증? 아니면 흥미인가?
“역시 그 ‘힘’을 쓸 생각은 없었구만. 억지력인가 뭔가로 쓰겠다던 소리는 진심이었군.”
“그럼 한 달 치에도 고생했던 너한테 그 장난질 하나를 막겠다고 ‘힘’을 써줄 줄 알았나?”
“가능성 중 하나이긴 했지. 아직도 신입 티를 벗지 못한 애송이가 꽤나 침착하단 말이야. 믿는 구석이 있어서 그런 건지.”
칭찬인지 비꼬는 건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던져놓고 새까만 닭이 일어섰다. 벌써 가려는 것인가? 나의 행동이나 내가 준비한 말들은 그의 흥미를 잡아두기에는 부족했던 것일까? 하지만 달리 그를 붙잡을 핑계가 없었다. 임무는 끝났고, 새까만 닭이 나에게 관심을 할애해야 할 공식적인 이유도 함께 끝났다. 하지만 내가 예상한 너는 여기서 대화를 종료할 자가 아니다. 너는 무엇이든 나를 곤란하게 만들 숙제를 던진 다음에야 떠날 것이다. 너라면 나의 이유를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으니까.
“여기서 문제. 너라면 그 아이의 복수를 어떻게 이뤄줄 거냐? 담청색 기린.”
그래서 새까만 닭이 벽에 세워둔 론누를 어깨에 걸치며 말을 걸었을 때 또다시 겉으로 웃음을 드러낼 뻔했다. 주머니 속에선 슬며시 두 주먹을 쥔 채 짐짓 능청을 부려본다.
“내가?”
“네가 그 웃기는 버르장머리를 얌전히 챙겨가며 나를 관찰하기만 한 건 목적이 있어서잖아. 그럼 나도 네 솜씨를 봐야겠어. 이 건은 네가 끝내라.”
“난 네 말마따나 기껏해야 기사 1년차인 애송이에 불과해. 그 새까만 닭도 할 수 없는 일을 왜 내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감이랄까? 네가 손대면 재밌게 될 것 같거든.”
“그럼 내가 맡는다 치고, 그 결과에 대해선 어떻게 할 셈이지? 새까만 닭.”
“넌 평소에는 약한 놈이야. 그러니 힘이 필요하지. 그냥 힘이 아니라, 네가 그 ‘힘’을 쓰지 않아도 어떤 임무든 완수할 수 있게 해줄 강한 기사의 힘. 이왕이면 최소한 한 달 치에는 맞먹었으면 싶겠지. 네가 가소로운 수작을 걸어가며 내 관심을 끌려고 재롱부리는 거, 그래서잖아.”
흠. 역시 들켰군.
“그래서 싫은가? 어쨌든 내기는 내가 이겼다고 생각하는데.”
“어쨌든 내기는 네가 이겼으니 네 다음 임무에는 내가 같이 갈 거야. 별개로, 네가 평소엔 약한데도 다른 기사를 부리려 드는 그 자신감에 걸맞은 솜씨가 있는지는 보여줘야지. 그러니 내가 납득할 수 있는 뭔가를 보여봐라. 기한은 흠, 1년쯤 잡아볼까. 대신 그동안 한 번 더 네가 원할 때 아무 조건 없이 네 임무에 같이 가주지.”
갑자기 두통이 느껴진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한 것 아닌가. 시스템 문제인데 어떻게 1년 안에 해결을 보라는 것인가? 이걸 모르지도 않으면서. 설마 내가 그 영주를 암살이나 모살이라도 하길 바라는 건… 아마도 아닐 테고… 한편으로 감기약을 만든 냄비에 “잘못” 들어간 물질을 눈감아주던 새까만 닭의 행동이 열쇠가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요는, 어떻게든 자신을 납득시켜보라는 것이겠지.
“그럼 내가 너를 납득시킨다면 어떻게 할 거지? 반대로 납득시키지 못할 때는?”
“글쎄~ 그건 이제부터 생각해볼까.”
“사람을 고생시키려면 그만한 대가가 있어야 할 것 아냐.”
“얘 좀 봐~ 넌 내가 필요하지만, 난 아닌데? 넌 거북이가 아니고, 난 코끼리가 아니라네~”
새까만 닭이 불빛을 등지고 다가온다. 나보다 키가 큰 건장한 기사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나를 덮쳐드는 그림자도 짙어진다. 코앞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투구 속에는 공허와도 같은 새까만 어둠만이 있다. 그런 모습으로, 새까만 닭이 달콤하게 속삭인다.
“그래도 우리, 오래 보게 될 것 같거든. 그러니 이 1년의 시간은 이제부터 서로 천천히, 진득하게 알아갈 기회 정도로 생각하자고.”
피가 얼어붙으면서 동시에 끓어오르는 기분이 든다. 그때의 실험 대련을 준비하던 때부터 나는 그럴 생각이었다. 너는, 이제야 그럴 생각이 들게 되었나.
다문 입 속에서 새까만 닭의 이름을 불러본다. 약해진 대신 얻은 ‘힘’. 그렇게 한 달간 압축한 ‘힘’을 버텨냈던 기사. 누군가를 죽일 걱정 없이 자유롭게 힘을 해방하면서 내가 무엇을 느꼈는지 너는 모른다.
내가 너의 눈에 들고 싶어 하는 것은 짐작했을지 모르나, 얼마나 너를 원하는지 너는 상상도 못할 것이다.
“좋아.”
내 대답에 돌아오는 대꾸는 없었다. 새까만 닭은 마지막으로 한창 일에 열중하는 대장장이들을 바라본 후, 몸을 돌렸다. 용광로에서 세차게 솟구치는 풀무불이 빛과 어둠을 극명하게 가르던 순간 투구의 면갑을 수직으로 가르는 가느다란 틈새 사이로 언뜻 옆얼굴을 이루는 윤곽이 보였던 듯하다. 나는 눈을 돌렸다. 명암조차 없는 그늘 속에 있을 사람의 얼굴은 그가 나에게 관찰을 허락한 것이 아니었고, 나 역시 알 필요가 없었다.
새까만 닭은 만월 아래 달빛도 불빛도 닿지 않는 뒷골목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글쓴이] 견습기사 님